자신을 잘 아는 것은 지혜로 가는 길로 향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자는 아마도 교만한 태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교만하고 거만한 자는 지혜로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금까지의 잠언과는 다르게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1절). 야게가 누구인지, 아굴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잠언을 받은 이디엘과 우갈도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굴을 솔로몬의 다른 이름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 역시 추측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마 구약시대의 한 지혜자라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굴은 자신을 지혜가 없는 짐승과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2절). 그런데 2절의 말씀은 4절까지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굴이 스스로를 지혜 없는 자라고 말하는 근거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잠언을 말할 정도로 지혜로운 자였지만 크고 위대하시며 존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자신을 짐승으로 빗대어 스스로 무지한 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고백은 참 지혜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양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면서 하나님을 평가하거나 규정하려고 드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성경을 좀 읽었다고, 성경을 좀 공부해보았다고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거나 마치 득도(得道)한 것처럼 행세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런 자들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지혜자는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에는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참 지혜자입니다. 좀 안다고 교만하지 말고, 거만하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목사들이 참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자연스럽게 5절과 6절의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스스로 무지하다고 깨달은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지혜의 단초(端初)가 됩니다. 그런데 교만하고 거만한 자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안다고 해서 여기에 자기의 생각을 자꾸 덧붙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잘못 가기도 합니다. 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다고 말씀합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오염된 것이 없이 정결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다른 것들을 더하고나 빼면 그 순전함이 오염되는 것입니다(6절). 때로 말씀을 전하는 자가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으면서 거짓말을 일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지혜자는 하나님께 “적당함의 은혜”를 구합니다(7절~9절). 적당하다는 것은 “대충”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딱 알맞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말에 대해서는 헛된 말과 거짓말이 아닌 필요한 말, 정직한 말, 상황에 알맞은 말을 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는 잠언 25:11의 말씀처럼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을 위해서는 딱 필요한 정도의 공급을 구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함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지혜롭게 살아감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부분 중 하나는 적당함에 만족하는 태도입니다. 그 정도면 되었는데도 자꾸 “조금만 더”라며 욕심을 부리다 보니 비참한 결말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5절과 16절도 이 부분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거머리를 예를 들어 자족(自足)함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 족하다 하지 않는 불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스올은 바닥이 없는 지옥이니 끝없이 내려가는 것을 빗댄 표현입니다.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구약 시대에 아기를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들은 매우 멸시를 받았던 탓에 어떻게 해서든 아기를 가지려는 끝없는 욕구를 갖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역의 땅은 대부분 메말라 있어서 아무리 비가 내려도 다시 건조해지는 상태를 이해한다면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은 멈추지 않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려는 속성이 있기에 불도 하나의 예로 들어간 것입니다. 끝나지 않는 욕심을 네 가지의 예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목회의 말년이 어려워지는 경우를 봅니다. 물질의 풍요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당함에서 멈출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지혜로 향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라는 생각을 갖는 순간부터 지혜는 내게서 점차 멀어져 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로서 교회나 성도들이 내게 대접하고 잘 대우해주는 것이 목사를 존경하는 척도라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욕심을 부리기 쉽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그러한 것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목사가 그것을 챙기려고 하기 시작하면 이미 목회는 물 건너간 것입니다. 목회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것을 챙기기 시작하면 지혜로운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딱 필요한 데서 멈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욕심으로 가득한 자는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니 부모를 업신여깁니다(11절, 17절). 자기의 생각을 더 고집하고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득을 더 챙기려다 보면 결국 부모와의 관계도 깨지는 것입니다. 또한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의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만하며(12절), 눈이 높아 다른 사람을 늘 아래로 내려다보며 깔보고(13절), 자기보다 약한 자를 모두 삼켜버리려는 욕망으로 가득합니다(14절). 이런 자들은 그 사회와 공동체를 심하게 깨뜨리는 자가 됩니다.
욕심은 온 산을 불태우는 불과 같습니다. 욕심은 그 끝이 없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중단하지 않으면 결국은 우리의 인생은 어리석은 자의 비참한 결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욕심을 부리려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할 때 하나님의 사람답게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도 욕심부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을 만족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