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잠언 17:1~14/ 미련하고 악한 자들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까?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 중 하나는 아마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는 더욱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은 미련한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러한 자들은 멀리하라고 종종 말씀하시지만, 목회 영역 안에는 그러한 자들도 있을 수 있는데, 교회공동체 안에서 목회자가 그러한 자들을 멀리할 수는 없기에 이러한 관계를 잘해나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읽다 보면 결국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로 보입니다.
1절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관계는 다툼이 아니라 화목이고, 화평입니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기쁨이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자녀 관계에 있어서 서로 좋은 관계가 형성된다면 6절 말씀처럼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는 고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그렇지 못한 이들도 꽤 많습니다. 같은 직장 안에서, 학교 안에서 그렇지 못한 자들을 만나게 될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능하다면 그러한 자들과는 맞닥뜨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자들이라는 것은 아무리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해도 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12절에서도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자주 맞닥뜨려야 하는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엔 맞대응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무시하라는 말은 상대방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시비를 가리려고 애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14절에서는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도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충고를 잘 받아들이지만, 미련한 자는 매 백 대를 때려도 고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종종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생명수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도 귀를 닫는 이들이기에 쉽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성령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기 않는 한 변화되기 어려운 이들입니다. 그들과 다투지 말고 마치 ‘그러려니’하는 마음으로 그냥 넘어가야 합니다. 어떤 이들을 미련한 자들과 사사건건 다투어 이기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미련한 짓입니다.
이런 미련하고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11절)고 말씀합니다. 이런 이들은 선(善)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늘 악으로 선을 갚는 이들입니다. 14절에는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결국 악과 미련함이 끊임없이 악순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미련한 자들에 대해서는 변화시키려고 너무 힘을 쏟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차라리 그냥 대충 넘어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러한 미련한 자들이 주변에 있는 것은 지혜로운 자에게는 연단과도 같습니다.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 공동체에, 우리 직장에 미련한 자들이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나를 연단하시는 도가니나 풀무로 여기는 것이 좋습니다. 잠언 27:17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좋은 친구도 서로를 연단하는 도구가 되지만 미련한 자들도 때로는 우리를 연단하여 단단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4절은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악한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과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 있는 이야기만 듣습니다. 세상의 뉴스거리나 이슈들에서도 자신이 관심 있는 부분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가 주장하는 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상대편의 이야기에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립니다. 그래서 진실이 가려질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죄악에 대해 모르는 척 덮어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허물은 실수로 저지르는 잘못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 단점, 부족한 부분, 지나간 실수에 대해서 거듭 말하지 않고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꼭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먼저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약점이나 단점을 이야기하기보다 상대방의 강점이나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 좀 난해한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8절)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뇌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부정적인 측면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8절의 말씀은 뇌물을 쓰면 안 될 일도 되게 한다는 뉘앙스의 말씀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다 해석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기서 사용된 뇌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쇼하드”(שחד)라는 단어인데, 성경에서는 대부분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쇼하드라는 단어는 선물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물론 선물로 번역되는 “마탄”(מתן)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있지만, 쇼하드라는 단어도 선물의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선물은 사람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뒤의 구절을 함께 살펴본다면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뭔가 부당한 부탁을 하기 위해 주는 뇌물이라기보다는 서로의 관계를 윤택하게 하는 매개로서의 선물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사람들에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주는 것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으로 해석한다면 그 시대의 세태를 꼬집는 말로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도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행정적 처리도 뇌물을 주어야 처리가 원활하게 되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그런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종종 뇌물이 있으면 안 될 것도 되고, 뇌물이 없으면 될 것도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세태를 꼬집듯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해석해도 될 것입니다.
저는 8절 말씀을 전자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을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의 관계를 윤택하게 하는 도구 중 하나가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