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사무엘상 15:16~35/ 끝까지 버리지 못한 탐욕의 추악함, 그 말로(末路)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2-06-01 06:38
조회
84

처음엔 그렇지 않았어도 점차 탐욕에 물들어 그 인생을 망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그러한 망조(亡兆)가 깃들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따라야 하는데(눅 9:23), 여전히 자기 욕심에 몰입되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영적 아둔함에 빠진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아각 왕을 사로잡고, 좋은 양들과 소들을 남기는 죄를 지은 것에 대해 하나님은 매우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 왕에게 책망을 넘어 더 이상 사울을 왕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극단의 조치를 내리십니다(23절).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17절)라고 되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실 땐 사울은 지극히 겸손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자 이제 스스로 큰 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자기의 주장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교만한 자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군주의 자리, 권력의 자리를 누리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셨지만, 이스라엘 왕은 다른 나라의 왕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최고의 권력을 쥔 높은 자가 되어 자기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목사, 장로, 집사의 자리가 세상처럼 권력이나 계급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 사용되는 종과 일꾼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의 태도는 순종의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탈취하기에 급급했습니다(19절). 순종이 아니라, 자기 욕심과 야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것입니다. 사울은 모두 진멸하고 아말렉의 왕인 아각만 사로잡아 온 것이고, 제사를 위한 양들과 소들만 탈취했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20절, 21절). 그것도 양들과 소들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백성이 원했기에 그러했다고 변명합니다(21절). 물론 정말 백성이 원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하나님의 명령은 제대로 백성에게 전달해야 하고, 그렇게 시행되도록 해야 할 책임을 가진 자입니다. 백성이 그렇게 하려고 하더라도 왕은 백성이 그렇게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려고 왕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속마음은 왕을 사로잡아 오고, 좋은 전리품(戰利品)을 탈취해오면 승전한 왕의 면모(面貌)가 더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무엇이 나쁠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세상에서 좋은 것을 취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좋은 것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어서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 국한(局限)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좋은 양들과 소들을 살려서 가져왔다고 핑계 댑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선택적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절)라고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절)라며 사울 왕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를 전달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합니다(23절, 26절).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 속에서도 청종하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19절, 22절, 24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느냐. 백성의 말을 청종하느냐를 잘 판단했어야 했는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들이 행하는 사술(邪術),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는 악한 행위라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행습, 종교적 형식, 종교적 관습보다 순종을 더욱 귀히,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때로 신앙을 핑계로 삶을 소홀히 하기도 합니다. 신앙 때문에 직장의 업무에, 학업에,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진 자라면 직장의 업무나, 학업이나, 가정에 성실해야 한다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신앙이 핑계가 되어 일상(日常)의 삶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울 왕은 백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했다는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24절).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표현했으나 진정한 자백과 회개라고 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자기가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합니다(25절). 사울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30절은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울은 자기의 잘못을 대충 얼버무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에겐 철저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겉모습만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27절을 보면 자기의 체면을 세우려고 하는 사울의 간절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간절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자 하는 간절함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간절함도 아니고, 자기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간절함도 아니었습니다. 이 간절함은 권위와 권력에 대한 간절함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탐욕의 간절함입니다. 겉모양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 대한 간절함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울의 속마음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각 왕은 처형되었고(33절), 사무엘과 사울은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더 이상 둘이 대면하는 일이 없었습니다(34절, 35절). 이 말은 사울조차 사무엘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말이고, 사울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35절은 사울을 보지 않은 주체가 사무엘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울도 사무엘에게 찾아가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기록하며 오늘의 본문이 마무리됩니다(35절). 슬픈 마무리입니다. 처음 선택되었을 때의 처음 마음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생각해봅니다. 힘을 가진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면목(眞面目)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끝까지 겸허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 끝까지 주님의 종으로서의 겸손한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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