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요한복음 7:53~8:20/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2-01-27 06:46
조회
129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어두움은 빛이 비쳐야 물러갑니다. 죄가 죄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죄는 의가 정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반대의 표현으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은 물론 다른 이가 더 큰 잘못을 했지만, 자기도 흠집이 있으면서 남의 것만 나무란다는 말입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은 자기가 더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서도 그보다 덜한 잘못을 저지른 자를 지적하는 것을 빗대어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어떤지 묻습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에 의해 판단하여 그 여인을 처벌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예수님 앞까지 데리고 온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인 것이 빤하게 보입니다. 용서해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고 트집을 잡을 것이고,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쳐놓고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짓 가르침이라고 트집을 잡을 요량이었을 것입니다(6절). 그들은 예수님을 대놓고 반박하고 무시하면서 굳이 이 여인에 대한 판단을 예수님께 요구하는 뻔뻔한 자들이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고견(高見)을 듣기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요청 앞에 예수님은 땅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십니다(6절). 예수님이 무엇을 땅에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둘러선 사람들의 죄명을 썼다고 하기도 하지만,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니 그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계속하여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다그쳐 묻습니다(7절).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아마 그 전 같으면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혔으면 크게 노를 발하면서 돌을 들어서 곧바로 던져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침착하게 시간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시는 예수님을 보며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9절). 아마 흥분한 상태에서 뭔가 논쟁을 시작했다면 그들은 더욱 흥분하여 돌을 들어 이 여인을 내리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먼저”라는 말도 그들이 돌로 치기를 꺼린 이유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냥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군중 심리에 의해 별 생각없이 돌로 치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니 누군가 돌로 그 여인을 치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돌로 친 그 사람을 보며 “넌 진짜 죄가 없는 것이 맞지?”라고 바라볼 것 같은 분위기도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서로 눈치만 보다가 하나씩, 둘씩 그 자리를 떠나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죄를 범한 것은 맞지만 너희들은 죄 없이 깨끗한가?’라고 물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을 정죄하기에만 급급하고 자신의 상태는 돌아보지 않는 자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은 이 여인이 명백하게 간음의 죄를 저질렀는데, 그 죄를 마치 없는 것처럼 넘어가셨는데,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죄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죄로 인해 처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당부는 이를 반증(反證)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죄를 처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요한은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함으로 심판과 처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절). 요한복음은 특히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이번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전의 내용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셨던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죄는 어두움에 속한 것입니다. 그 어두움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에 정죄가 아니라 그 죄악을 밝혀 생명의 빛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12절). 주님은 이 세상의 어둠을 비쳐 생명의 빛을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트집을 잡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니 그것은 참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13절). 누군가 다른 사람이 증언을 해야 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말하는 것은 증언으로 채택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말에 “너희는 날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말씀하십니다(14절). 그러면서 너희들은 육체를 따라, 겉으로 드러난 것들을 보며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15절). 이 말씀은 예수님은 판단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판단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면 판단할 날이 올 것이지만, 지금은 판단하지 않겠다는 표현입니다. 판단하지 않는다는 헬라어 표현(οὐ κρίνω, 우 크리노)은 현재 시제로 사용되어 지금은 심판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있으면 참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십니다(16절~18절).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도무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19절).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알쏭달쏭한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메시아(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믿으려는 마음이 전혀 없으니 그저 속 답답한 동문서답(東問西答)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이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도 이상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이해 안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이면 다 이해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어두움을 밝혀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생명의 빛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아를 빛으로 표현할 때가 많았기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말씀은 곧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내 안의 모든 죄악이 빛으로 말미암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은혜를 누립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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