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요한복음 7:14~24/ 껍데기 종교냐, 알짜배기 신앙이냐?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2-01-24 10:19
조회
127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잘 지켜 행하는 것이 신앙인 줄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속엔 온갖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이들이 참 많습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 의식에서도 그런 예들이 많습니다. 전통과 관습에 따라 특정한 순서를 넣어야만 예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 등이 들어가야 예배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땐 예배 시간에 기타를 치며 반주를 하면 매우 경박한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찬송가에 나온 찬송이 아닌 다른 찬양곡을 부르면 화를 내면서 “예배 시간에 도대체 뭔 짓이냐?”고 꾸짖는 어르신들도 있었습니다. 묵도부터 시작해서 축도로 마쳐야(안수받은 목사님이 없을 땐 주기도문으로 마쳐야) 제대로 된 예배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는 더 형식적으로 빠져가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은 점차 드물어져 갔습니다. 이런 예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형제들에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면서 초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시겠다고 했지만, 조금 늦게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14절). 아마 자기의 형제들이 원하는 것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드러내어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내어 정치적 메시아로 주목받게 하는 것임을 아신 주님께서 형제들과 따로 올라가심으로 형제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랍비 학교 등에서 배운 것도 아닌데 이런 가르침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놀랍니다(15절). “어떻게 글을 아느냐?”는 15절 말씀은 단지 글자를 안다는 말이 아니라 “어찌 이렇게 학식이 뛰어나느냐?”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 당시 랍비들은 스승의 문하(門下)에서 제자로 입문하여 학문을 배운 후에 랍비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뛰어났기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답하십니다(16절). 배움과 훈련에 의해 나오는 가르침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가르치심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바른 가르침을 주어도 자기의 주장으로 가득한 사람은 들을 귀가 없기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쉽게 분별하여 깨닫습니다. 구도자(求道者)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자기 생각과 자기주장에 갇힌 사람들은 아무리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도 도무지 깨닫기 어렵습니다.

18절에서는 자기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르침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여 자기 영광만을 구한다고 지적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하여 가르칩니다. 목사들이 그러기가 쉽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을 빗대어 설명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습니다. 목사가 아니더라도 자기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강조하는 이들도 꽤 많습니다. 문맥과 그 말씀의 의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 필요에 의해 성경말씀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하고 자기주장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일에 능통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절)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니 사람들이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항변합니다(20절). 이 말은 “너 정말 미쳤구나”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언제 당신을 죽이려고 했느냐며 거세게 반박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할례를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21절~23절). 율법에 할례를 행하라고 했다고 하여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면서 안식일에 온 몸이 아픈 병자를 고쳐주었다고 문제를 삼는 것이 마땅한 일이냐고 반문하십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는데 이로 인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며 문제를 삼았던 사건을 거론한 것입니다(요한복음 5장). 자기들이 틀을 만들어놓고 그 틀 안에서 행하라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모습을 꼬집는 것이었습니다. 전통과 관습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외형을 위해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은 이미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 의식의 순서와 전통을 준수하더라도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다면 그건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을 교회의 법과 규약에 맞추어 잘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섬김의 모습을 잃어버리면 그건 이미 교회의 직분자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꼭 월세나 전세 이상의 예배 장소를 얻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해야 교회로 인정하겠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주변에 교회 개척을 시작하려는 분들 중에 이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꽤 많더군요).

그래서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24절)고 말씀하십니다. 외형적인 모습이 중점이 되면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본질에 중점을 두어 본질이 살아있으면 외형은 제대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린 자꾸 그 순서를 바꾸어버립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지 말고, 진정한 의미와 의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며 허울은 좋은데 교회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교회들이 생겨나는 것이고, 겉모양으로는 목사처럼 보이기 위해 복장이나 목소리 등을 갖추었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목사의 모습을 잃어버려 삯꾼 목자처럼 변질된 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과 관습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을 넘어설 정도로 본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하면 껍데기만 남은 종교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나 나의 신앙은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만든 허울 좋은 종교인지, 아니면 겉모습은 조금 초라하고 투박하게 보여도 복음의 본질과 말씀의 본질로 가득한 알짜배기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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