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요한복음 5:1~15/ 희망 고문, 참된 희망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2-01-15 07:38
조회
124

어떤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중간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그 사이에 빨간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이 신속히 뛰어가서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고 응급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쓰러진 사람이 회복되도록 도왔습니다. 이것을 본 또 다른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구한 이에게 “당신은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도로로 뛰어들었으니 교통법규를 위반했소!”라며 손가락질을 했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오늘의 본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은 병자에게 누웠던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안식일의 규례를 어긴 것이라고 정죄하고(10절), 병을 고친 예수님에게도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며 트집을 잡기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16절).

베데스다 연못은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그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을 가진 이들이 늘 그 연못 옆에 진을 치고 물이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떠도는 풍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물이 움직일 때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연못에 내려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환자도 그러한 상황을 이미 경험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는 모든 병자들이 아니라,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4절). 그러니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질병을 가진 자들은 행동이 굼떠서 도저히 맨 먼저 연못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일등만 성공한 것으로 여기는 현대 사회의 모습과도 유사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38년이나 병을 앓으면서 거동도 불편한 이 병자는 아마 희망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가닥 희망이라는 것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것밖에 없으니 요행을 기다리며 주야장천(晝夜長川)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희망 고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루어지기 어려운데도 다른 대책이 없으니 실낱같은 희망으로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어서 헤어나오기 힘든데 ‘죽지 못해서 산다’는 심정으로 그냥 버틸 때도 있습니다. 마음이 연약한 자들은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하는 하지 말아야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희망은 만의 하나 생길 수 있는 요행 말고는 없다면 인생이 캄캄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의 병이 오래되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병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이 질문이 굳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당연한 것인데 뭘 묻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싶을 만한 질문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기에 이 병자는 “그렇다”는 답변이 아니라 자기의 처지를 호소합니다. 이 호소는 당연히 낫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희망은 오로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가정 먼저 내려가는 것밖에 없다는 절박한 마음도 담아서 호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의 능동적 답변을 원하셨습니다. 그냥 고쳐주실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대화를 나누시며 자기의 처지를 스스로 다시 한번 보게 하셨고 그 처지에서 회복되길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십니다(8절). 그리고 이 병자는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습니다(9절). 아무리 일어나 걸으라고 해도 ‘무슨 소리냐? 아파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나에게…’라며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치유는 일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병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었습니다. 순종이 치유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 병자의 치유됨을 기뻐하기보다는 안식일 규례를 들먹거리며 트집을 잡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었다는 것이 이 병자를 향한 트집이었습니다(10절). 안식일에는 짐을 옮기면 안 된다는 그들의 규범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병자는 자신은 자기를 낫게 한 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는 변명을 합니다(11절). 자기가 트집잡히지 않기 위해서 핑계를 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 자리를 피하셨고, 이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분이 예수라는 분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입었지만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자가 누군지를 몰랐습니다.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만나서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신체적 질병은 나았지만,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질병이 걸리면 더 심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적 필요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만 몰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이 맑고 건강해야 합니다. 육신의 문제는 육신의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영혼의 문제는 영원한 것이기에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영원한 고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건강한지 수시로 살펴야 합니다.

이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가서 알립니다(15절). 유대인들(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자기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었다는 지적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14절)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고깝게 들려서 그러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그의 영혼을 위해 진심을 담아 말해주었는데 ‘자기가 나를 고쳐주었으면 고쳐주었지 어디서 내게 지적질이야?’하는 마음이 든 건 아닐까요? 물론 이건 순전히 제가 한번 생각해본 것에 불과합니다만…. 어찌 되었든 이로 인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게 더 미움을 받게 됩니다.

내 인생이 어둡고 캄캄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확실한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참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케케묵은 우리의 문제들도 주님만이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참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치열하게 다투며 내려가야만 치유될 수 있는, 그것도 이루기 어려운 아주 실낱같은 희망만 가지고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세상보다는 우리 주님을 붙들고 오늘 하루 승리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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