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요한복음 4:15~26/ 내가 바로 그다.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2-01-12 07:46
조회
129

사람마다 드러내기 싫어하는 수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 없는 것이어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부분도 있고 바르지 못한 것이 명백하여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치도 있습니다. 그러한 수치스러운 부분은 누구나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점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면 감추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 여인의 수치스런 부분을 말하게 됩니다. 남들이 우물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땡볕의 정오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오게 되는 상황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도 이 여인의 과거와 현재가 드러나는데, 이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18절).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 함께 있는 자가 남편이 아니라는 말은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이 여인이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오지 못하고 가장 햇볕이 뜨거운 정오에 조심스레 물을 길으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니 그 물을 달라고, 그래서 이곳으로 물을 길으러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합니다(15절). 이 여인은 현실적 필요를 예수님께 구한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예수님 자신이심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우리 삶의 활력소로 삼으려는 방편으로 생각하거나, 내 인생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기도도 내 필요를 채워달라는 간구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신앙이라는 것을 내 약점, 나의 수치, 나의 세상적 필요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현실적 내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거나 하나님께 등을 돌릴 때도 많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께 현실적 필요를 구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리고 이리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16절). 이 여인의 문제를 여지없이 드러내시려는 질문입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답을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상황을 정직하게 드러내놓습니다(17절, 18절). 우리 안에 깊이 감추고 있는 문제들, 수치들, 죄악들, 약점들을 주님 앞에 드러내놓지 않고서는 주님의 치유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의 증세를 감추고 의사에게 진단을 내려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제대로 진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청진기나 촉진(觸診), 채혈(採血)검사, 소변검사, 내시경, 엑스레이와 MRI 등을 통해서 드러내야만 제대로 된 치유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갖 문제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문제들을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할 때 주님의 치유하심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악들을 주님 앞에 숨김없이 내려놓아야 주님의 용서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수치까지 다 아시고 있음을 안 이 여인은 대화의 주제를 바꿉니다. 이것은 자기의 수치스러운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한걸음 다가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라고 고백하면서 예배에 대한 질문으로 대화의 주제를 바꿉니다. 현실적 문제에서 영적 문제로 국면이 바뀐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대한 질문을 하였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도 서로 견해 차이를 두고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서 배제되었습니다(스 4:1~6; 느 4:1, 2). 이방민족과 섞여 혼혈이 된 사마리아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후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후에 그리심 산의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이 예배의 장소라고 주장했고, 유대인들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이 예배의 장소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 이 여인은 어디가 정말 예배의 장소냐고 물은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갈등을 표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 여인은 제대로 예배하기 위한 간절함에서 묻는 질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고 답하신 후(21절),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23절). 장소는 예배의 본질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예배의 태도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24절). 그리고 참된 예배의 중심은 예배의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22절). 구세주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다는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절)고 말씀하시면서 다윗의 족보를 통해서, 유대인의 계통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제사에도 제물이 빠질 수 없었는데,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배야말로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절)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고 명백히 드러내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꿰뚫고 계시고 도저히 해결책이 없다고 여겨지는 그 모든 인생의 문제들까지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처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목마른 것들, 우리의 갈급한 것들, 세상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수많은 갈급함들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 앞에 내 수치와 죄악, 그리고 내 아픔과 고통과 갈급함을 고스란히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께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우리의 모든 갈급함을 영원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내 앞에 서셔서 “내가 바로 그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우리를 내어 맡긴다면 그 놀라운 은혜를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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