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사사기 19:22~30/ 차악(次惡)을 선(善)으로 착각하지 말라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1-12-09 07:47
조회
109

‘미치겠다.’ 오늘의 성경본문을 읽으면서 마음 속에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표현도 떠오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의 영적 불감증과 도덕적 타락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끝판왕입니다. 자기들 스스로도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30절)라고 말할 정도의 극심한 타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갔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의 자기 집에 찾아온 두 천사를 내어달라는 소돔의 사람들에게 자기 딸을 내어주겠다고 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창세기 19장). 다행히 롯의 경우 롯의 집에 방문한 천사들이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무마(撫摩)되었지만, 오늘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안타깝게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소돔도 그러했지만, 기브아도 동성애가 만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일행이 묵고 있는 노인의 집에 찾아와 레위인을 내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와 관계하겠다는 22절의 표현은 성적인 표현으로 동성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의 요청에 집주인인 노인과 레위인은 맞서기보다는 대안을 찾는데, 그것은 노인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24절). 남녀의 성적인 관계보다는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크게 어긋나는 것은 맞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 관계가 아닌 상황에서 자기의 딸이나 자기의 첩을 내어주어 성적인 노리개로 삼게 하는 것도 분명한 죄악입니다. 그런데 마치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것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자기 딸을, 그리고 자기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성적인 노리개로 내어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25절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 첩은 자기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간 것입니다. 친정으로 간 첩을 데려오기 위해 베들레헴까지 가서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기가 화를 면하기 위해 자기의 아내인 첩을 내어준 것입니다. 비겁하기 끝이 없습니다. 맞서서 막아주어야 할 주인이, 남편이 자기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첩을 내어줍니다. 책임감도 없고, 도덕적 양심도 없고, 더더구나 영적인 측면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사람들이나 이들을 향해 자기의 첩을 내어주는 레위인이나 그 당시의 타락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밤새도록 능욕당하다가 새벽에 가까스로 묵고 있는 집에 왔지만 얼마나 시달렸는지 죽고 맙니다(25절~28절). 엎드러져 있는 자기의 첩에게 말하는 레위인의 말도 정말 무심(無心)합니다.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28절) 자기 아내에 대한 염려의 말이나, 엎드러져 있는 아내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의 표현도 없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서 집으로 가자고 말하고 있는 모습은 허탈한 마음까지 들게 합니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집으로 와서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온 이스라엘 지파에게 보내어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제대로 판단하고 치리할 지도자(왕)가 없었기에 이런 처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표현으로 오늘 본문의 사건에 대한 기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율법도 심중(心中)에 없습니다. 잘못된 일들이 행해질 때 이 부분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하여 판단하고 책망하고 다스릴 지도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요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멋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最善)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최선도, 차선(次善)도 아닌 최악(最惡)이나 차악(次惡)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도 많습니다. 어쩌면 차악(次惡)을 마치 선(善)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 거룩하심을 닮은 삶입니다(레 11:45; 벧전 1:15, 16).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도덕과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면서 이에 대한 무감각 속에 살아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삶의 주변에도 악(惡)이 만연합니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좀 낫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그것 역시 선(善)이 아니라 차악(次惡)일 경우도 많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진짜 성도로서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도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주목하며 하루를 살아가길 마음 속에 다짐해 봅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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