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사사기 1:22~36/ 절반의 성공, 미완성의 가나안 정복 - 사사시대의 암울한 서막(序幕)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1-11-03 07:05
조회
123

오늘의 본문 말씀 이전에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점령한 기록이 나오고 있고, 21절부터 36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로 구성된) 지파, 스블론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 단 지파의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땅을 점령함에 있어서 매우 불편하고 아쉬운 표현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은 “쫓아내지 못했다”라는 표현과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했다”는 표현입니다. 그들 중에 거주했다는 표현은 공동번역 성경이나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가나안 족속이 섞여 살았다”는 표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그 땅의 모든 주민을 쫓아내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함께 공존(共存)하고 공생(共生)하면 좋은데 왜 그렇게 잔인한 명령을 내리셨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려면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악으로 가득한 가나안 땅의 이방 문화와 절대 섞이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우리 몸에 어떤 부분이 썩어들어가는 질병이 있다면, 치료하여 완전히 회복하게 하든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도려내거나 잘라내야 온 몸이 건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을 쫓아내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비추어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는 했으나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을 내어쫓지 못하고 함께 섞여 살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유다 지파가 철 병거를 가진 산악 지역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한 것처럼(19절), 다른 지파들도 가나안 족속의 극렬한 저항에 못 이겨 어느 정도의 땅을 점령하여 거주지를 마련한 후에는 그 땅에 살고 있는 가나안 거민들을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자기들의 힘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스스로 포기하기도 했고, 이 정도의 땅을 차지했으면 충분하니 나머지 땅은 가나안 족속이 살아도 되지 않겠나 하는 안이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히 기억하고 행해야 하는데, 그 명령을 간과하고 자기의 편의(便宜)대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내 편의대로 바꾸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19절에도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 산지 주민을 쫓아냈으나 … 골짜기의 주믽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기록했던 것처럼 22절의 말씀에서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요셉 지파에 속한 두 지파(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가 정복 전쟁을 수행할 때 “쫓아내지 못하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27절, 29절)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기록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쫓아내지 못했다는 아이러니(irony)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다보면 처음엔 쫓아내기가 버거워서 쫓아내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이스라엘이 강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쫓아내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오고 그들을 부역(賦役)꾼으로 삼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23절부터 26절에 나옵니다. 요셉 가문(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이 벧엘을 치러 갈 때에 그 성읍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벧엘로 들어가는 문을 좀 안내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마 정문이라기보다는 비밀리에 벧엘의 성읍으로 들어가는 문을 안내해달라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면 선대(善待)하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사람의 도움을 받아 벧엘을 점령한 후에 이 사람의 가족을 살려주었는데, 이들은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곳 이름을 루스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6절). 벧엘의 이름은 원래 루스였습니다. 그런데 요셉 가문에 의해 살아난 이들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원래 벧엘의 이름이었던 루스라는 이름 그대로 성읍을 건축하였습니다. 즉 이전의 문화와 삶의 관습을 그곳에서 그대로 이어갔다는 말입니다. 그 땅의 우상들과 문화를 진멸해야 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놔둔 결과가 된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 2장에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여리고 성으로 보냈을 때 그 정탐꾼을 도와준 라합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라합 스스로가 먼저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수 2:9~14) 정탐꾼을 도와주었지만, 벧엘의 성읍 입구를 안내해 준 이 사람은 그러한 고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요셉 지파가 도움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처신한 것이니 비슷한 모양새 같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철 병거가 있어도, 그들이 강력하게 저항해와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넉넉히 이겼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었을 때 이미 계속해서 경험했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의 능력과 전략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싶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우기보다는 포기하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더 강해져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부역꾼으로 삼으며 함께 거주하기를 허용했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을 보면 금방 나오는 내용이지만, 결국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급격하게 우상 숭배에 빠지고 죄악에 빠져듭니다. 가나안의 죄악 된 문화에 젖어 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철저하게 구별되어 가나안 족속들의 문화나 우상 숭배를 진멸하고 거룩한 백성의 모습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혼란과 암흑으로 가득한 사사시대가 시작되고 만 것입니다.

때로는 공생(共生), 공존(共存)이 미덕(美德)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악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아니오”를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거부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다운,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사시대와 같은 죄악으로 물든 암흑과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혹시 나는 세상과 타협하며 죄악 된 것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쫓아내지 않고, 함께 뒤섞여 지내며 그저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며 하나님의 구별된 자녀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복된 삶이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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