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이사야 63:15~64:12/ 뻔뻔한 기도- 아버지여,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1-08-13 11:31
조회
243
총체적(總體的) 난국(亂局)에 이르면 답을 찾기 어려워집니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도 자신의 문제를 알지만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를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당면한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64장 4절부터 7절은 그러한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가슴 답답한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앙망하고 바라보는 자에게 심판을 내리시거나 징계를 내리시지 않는 분이십니다(4절). 그런데 5절은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한탄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한 사실이 너무 명백하고, 심지어 이러한 현상이 오래 되어서 선처를 구하기도 어렵다고 한탄합니다. 6절은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스스로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의롭게 행하려고 애써봐도 더러운 옷과 같은 자신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라”고 고백하는 7절 말씀처럼 주님을 부르거나 붙잡는 자조차 없는 현실을 토로(吐露)합니다.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비와 사랑을 간구합니다. 63장 15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베푸셨던 자비와 사랑을 추억하며 그 자비와 사랑을 다시 간구합니다. 그러면서 63장 16절에서는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고 고백합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십니다.” 이 고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열고자 합니다. 역사적 인물이었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야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은 이미 죽어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돌볼 수 없더라도 늘 살아계셔서 구속자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실 수 있는 아버지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63:17~19).
64장에서도 하나님께 아버지라는 고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64장 8절에서도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징계를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잃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64장 9절에서는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라며 애절하게 부르짖습니다.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성전을 회복시켜달라고 부르짖습니다(64:10~12). 그래서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그 위엄 앞에 떨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64:1~4).
오늘의 본문 내용은 매우 뻔뻔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징계를 받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향해 부르짖지도 않고 주님을 붙잡지도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니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달라고 부르짖는 기도이니 얼마나 뻔뻔한 기도입니까? 그렇지만 이 뻔뻔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총체적 난국 속에서 그 해결자는 하나님밖에 없음을 깨닫고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매우 뻔뻔한 기도일 가능성이 큽니다.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자격을 갖춘 후에 기도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 아니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64장 6절 말씀처럼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애써서 노력해보아도 하나님의 절대적 의(義)와 거룩함 앞에서는 결국 더러운 옷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속옷도 다양한 색으로 나오지만 제가 어렸을 적에는 대부분 흰색 속옷이었습니다. 처음에 구입 했을 때엔 눈부실 정도로 하얗지만 한번 입고 빨래를 하고 나면 누렇게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새하얗게 빨아도 새 속옷과 견주어보면 금방 그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누렇습니다. 우리의 의(義)는 하나님 앞에 댈 수 없습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은 뻔뻔하지 않고는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이 참 감사한 일입니다. 히브리서 4:16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전의 구절들에서는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임을 명백히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완악함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가장 큰 죄악은 자신의 연약한 죄인임을 간과(看過)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행하는 노력과 애씀이 자기들의 의(義)로 여기고 교만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8:9~14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자기 의로 가득하여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세리의 기도가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자기가 지닌 총체적 난국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왔다면 아마 그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께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정말 연약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우리의 의(義)는 하나님 앞에 더로운 옷과도 같네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니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셔서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에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그 은혜를 바라며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자비로 하루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