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욥기 42:1~17/ 주권자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욥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3-12-20 07:32
조회
48

욥기 묵상의 마지막 장이 되었네요. 욥기의 결론 부분이기도 합니다. 욥기에서 욥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을 때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것이(욥기 2:11에 분명히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어설픈 충고만 하다가 오히려 욥을 책망하는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친구들의 이러한 모습에 욥은 서글프고 억울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吐露)하였고, 하나님께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원망 섞인 불평을 쏟아냅니다. 이러한 욥을 향해 드디어 하나님은 직접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을 조성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어찌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느냐고 되물으시며,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主權)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順服)합니다. 하나님의 무소불능(無所不能)을 고백합니다(2절). 하나님은 못 하실 일이 전혀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絶對者, Absolute)이시기에 하나님께는 사실 “왜?”라는 질문은 필요 없습니다. 물론 신앙의 여정(旅程) 속에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십니다. 우리와 교제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이 “왜?”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음이 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왜?”라는 질문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는 “왜?”라는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면서 무지(無知)한 말을 내뱉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3절). 그래서 욥의 질문도 항변하는 질문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묻고 듣겠다는 것으로 바뀝니다(4절). 새번역 성경은 4절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라고 번역했는데, 문맥상으로 볼 때나 히브리어 원어적으로 볼 때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한 욥의 질문이 달라졌다는 말씀입니다. 욥은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是認)하면서, 이제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절)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귀로만 들었었습니다. 즉 머리로만 알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눈으로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였다는 말입니다. 지식적으로만 아는 하나님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올 때 삶에서 배제(排除)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오면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욥의 믿음이 추상적인 것에서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이 겪은 혹독한 고난과 고통은 욥에게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는 귀한 시간들이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부족하고 연약함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 회개합니다(6절). 하나님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보였던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고통으로 인한 원망과 하소연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기다리는 태도가 부족했다는 것을 고백하며 회개한 것입니다. 욥의 겸손한 모습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가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에 대해서도 책망하십니다(7절).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도 다 틀렸다고 책망하십니다. 욥의 친구들이 한 말들은 그 내용만으로 볼 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이 옳지 못하다고 책망하십니다. 욥에 대해 오해하며 이야기한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의 내용이 옳다고 하여도, 그 적용이 잘못되면 잘못된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을 책망하시면서 욥의 세 친구들에게 희생제물을 준비하여 욥이 욥의 세 친구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8절). 그리고 욥의 세 친구들과 욥이 그대로 행하여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을 용서하십니다(9절). 욥은 자신의 세 친구들이 자기를 정죄하며 책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이 세 친구를 위해 번제를 드려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욥의 선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문제가 있어서 서로 갈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잘못했으면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손을 내밀어 화해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욥의 세 친구만 책망하시고, 엘리후에 대해서는 언급하시지 않는가에 대해 궁금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지는 않아서 분명한 이유를 말하기 어렵지만, 엘리후는 욥에 대해 꾸짖을 때 욥이 악한 행위를 했기에 그 고난과 고통을 받는다고 책망하기보다는 욥이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욥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에 대해 지적을 하였기 때문에 욥이 겪는 고난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에게 다시 일상(日常)에서 누릴 복을 주십니다. 12절에 보면 욥에게 주신 소유의 축복을 열거하고 있는데, 욥기 1:3과 비교해 보면 정확히 두 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허락하셨는데(13절), 딸들의 이름에 대해서 14절에 나옵니다. 딸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지만, 아들들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는 것도 의아하긴 합니다. 아마도 아들들은 그 당시에 기업을 이어갈 자손으로 여겨졌지만, 딸들은 비교적 그러한 상속 등에 배제되는 상황인데, 딸들마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아들들처럼 기업을 주었다는 표현에서(15절), 욥이 누리는 축복을 극대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딸들의 이름은 14절에 소개되고 있는데, 참조로 그 이름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미마(יְמִימָה, Jemima)는 비둘기 중 하나인 호도애(Turtledove)라는 의미이고, 긋시아(קְצִיעָה, Keziah, Kezia)는 계피나무, 게렌합북(קֶרֶן הַפּוּךְ, Keren-happuck)은 화장품의 일종인 물감 혹은 그 물감을 담는 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은 수명(壽命)이 다하기까지 잘 살다가 나이가 차서 죽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16절, 17절), 욥이 고난을 겪은 이후에 140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고 기록합니다(16절).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인 70인역(LXX)에서는 욥은 총 240년을 살다가 죽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욥이 고난을 겪을 때의 나이는 대략 70세 정도로 추측됩니다. 흔히 동화책에서 나오듯이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결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해피엔딩(Happy Ending)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순교자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비극적인 결말(Sad Ending)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인생을 넘어 하나님 나라에서의 결말이 준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마음에 두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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