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이사야 44:1~20/ 나는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가?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1-07-19 13:30
조회
225

요즘 그리스도인들의 위상(位相)이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목사에 대한 신뢰도 역시 많이 내려간 상태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 스스로 자초(自招)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이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일들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뻔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한 부분에 대해서는 머리를 조아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교회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이지 못한 것이지 그리스도인 됨이나 교회의 존재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다(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인해 온 천하 앞에서 수치를 겪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혹독한 회초리를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자체가 그 존귀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온갖 고초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여전히 나의 것이며 내가 너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시면서(사 43:1, 4)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사 43:1, 5). 오늘의 본문에서도 연이어 두려워 말라고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2절, 8절). 너희가 지금은 너희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혹독한 징계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에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가 택한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1절, 2절). 이스라엘에 대한 별칭(別稱)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여수룬”이라고 부릅니다. 여수룬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랑을 받는 자, 의로운 자, 옳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시적 표현의 명칭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고 표현할 때엔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어야 할 이상적 모습을 강조하며 말씀할 때 사용되고 있는 명칭입니다. 즉 “너희가 지금은 범죄함으로 인해 고난을 받고 있지만 너희는 ‘여수룬’(옳은 자, 의로운 자, 사랑받는 자)이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하여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며 하나님의 복을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3절). 마치 시냇가의 버들처럼 푸르고 싱싱한 모습으로 회복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4절). 그러면서 5절에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때에는 ‘나는 주의 것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야곱’의 이름을 써서 그의 자손임을 자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팔에다가 ‘나는 주의 것’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5절,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며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6절부터 8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다른 신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매주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하였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것이 부끄럽게 되는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서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 바가 되면 그 자랑스러움까지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예전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동차 뒤에 기독교인이라는 표시로 물고기 모양도 붙이고 기독교적인 디자인들을 부착하고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렇게 붙이는 것이 스스로 부담스러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제가 얼마 전까지도 독일에서 살다 왔는데 독일에는 아직도 물고기 표식을 붙이고 다니는 차량이 눈에 많이 띄고 있다는 것을 보면(진정한 기독교인의 비율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데 말입니다.) 단지 시대의 흐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젠 심지어 교회의 차량에도 교회 이름을 붙이지 않는 차량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당당히 자랑스러워할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교회의 모습이 온전하게 회복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있음을 증언할 증인들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8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삶이 아니라 전능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보일 수 있는 당당한 증인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어지는 9절부터 20절 말씀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같은 나무로 일부는 땔감으로 사용하면서 음식을 만들고, 난방을 하면서 또 그 일부로는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며 섬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설명하면서 19절, 20절에서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탄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한탄하십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는 것들은 우리가 만든 허상(虛像)에 불과합니다. 현대의 우상은 물질(돈)과 권력과 쾌락과 편안함(평안과는 다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해주고 참된 행복을 줄 것이라 여기면서 끊임없이 그것들을 향해 달음질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 역시 우리의 도구일 뿐이지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의지하실 분이십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살피면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길 다짐해봅니다. 그래서 오늘 하는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당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