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구원자를 알아보는 것은 축복입니다. 누가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실 분인지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때로 눈이 멀어 참된 구원자를 보지 못하고 엉뚱한 자들에게 구원해달라고 매달립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우상들에게 매달리거나, 주변 강국들에게 매달리는 어리석음을 보였습니다. 요즘도 이단과 사이비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매달리는 이들도 있고, 물질이나 권력 등에 매달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구원자로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구원자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4개의 노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42:1~9; 49:1~7; 50:4~9; 52:13~53:12). 이 여호와의 종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귀환하게 하는 지도자를 일컫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의 그 당시 선지자, 혹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페르시아(바사)의 고레스 왕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등을 일컫는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 여호와의 종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종이 어떤 분인지 소개하고 있는데, 그 분은 강압적이나 폭력적으로 일하지 않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2절). 그래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3절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은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원자를 보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셔서(6절) 온 세상을 구원할 분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 구원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결코 다른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8절은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4:12에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10절부터 13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로 인해 찬양하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이사야에서 종종 “섬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당시엔 바다가 땅끝이라고 여겨졌기에 바다에 있는 섬들은 종종 땅끝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온 세상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의미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만큼 우리에게 축복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종종 그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바쁜 하루의 일정을 보내다보면, 우리가 맞닥뜨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잊고 오히려 불평하고 어려움만 호소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큰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과 흡사한 모습입니다. 오늘도 구원으로 인해 감사와 찬양을 잃지 않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구원해 주시겠다고 14절부터 17절까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구원을 베푸십니다. 14절에서도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마치 해산일까지 고통을 참고 기다리는 산모(産母)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잠잠하여 참으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6절).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처럼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20절에서는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21절)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축복을 빼앗기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제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길로 다니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24절).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말았습니다(24절, 2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존귀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귀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고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격을 잃지 말고 감사하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감격을 도둑맞지 않고 구원받은 자의 존귀하고 복된 삶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