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야고보서 2:14~26/ 행동하는 믿음

작성자
phil120
작성일
2021-07-05 10:48
조회
174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아니라 드러난 행동이 진짜 나의 모습입니다. 물론 외식적(外飾的)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외식적 행동은 머지않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치 있게 여긴다고 생각하고 말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시간이나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그것은 실제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나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긴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을 하는데, 예배하는 시간보다 다른 것들(친구들과의 약속, 좋아하는 축구팀의 중요한 경기 등)에 더 시간을 드린다거나, 아내(남편)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시간은 어떻게 해서든 내면서 아내(남편)와의 시간은 소홀히 여긴다면 실제로 이 사람이 가치 있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허상(虛像)에 불과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면서 그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헛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20절에도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고 탄식합니다.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는 쉽습니다. 말끝마다 믿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기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전혀 희생할 줄 모르는 것은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15절, 16절에 예로 들어 말씀하고 있듯이 말로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 가치 있는 것에 행동으로 참여할 때 그 진정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뿐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17절).

요즘 기독교가 세상에서 신뢰를 많이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으로 베풀어라,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귀하게 섬겨야 한다는 등의 말을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그러한 모습을 찾기 힘들어지기에 이젠 그 귀한 가치들이 헛것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뜨겁게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교회에서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미소 띠며 인사를 주고받는 것 같은데 일상에서는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의 이득을 위해 아등바등하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조차도 집단 이익을 위해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세상에 대응하려고 하기에 교회공동체를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7에 보면 예루살렘교회에 대해 기록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온갖 핍박을 당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교리적(종교적)으로는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것은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교리적(종교적)으로는 미워하고 배척했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은 흠 잡을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러해야 합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기에 반목(反目)하면서도 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존경할만한 부분이 많아’라는 평가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지식(정보)”을 믿음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미 서두에 이야기했지만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19절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을 위해 시간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고, 마음도 드리고, 내 모든 것을 드릴 때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헌신하기보다는 오히려 대적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성도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알고 있는 지식(정보)에 자신을 헌신할 때 진정한 믿음으로 인정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기에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 성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에 아직도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생각 속에 갇힌 믿음, 말에만 담겨 있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마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기록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자신이 그 말씀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믿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교회는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26절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런 껍데기만 남은 신앙은 교회를 썩게 만들어 갑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할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몸을 사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움츠러들어 있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당장에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해서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저 말로만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 생각 속에서만 믿음을 가지고 있지 말고 일상 속에서 과감하게 믿음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들도 지금까지의 전통과 관습에 빠져있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감에 있어서 걸리적거리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떨쳐내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질이 아님에도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전통과 관습 때문에 그 안에 안주해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공동체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그 믿음을 과감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들도 관습에 빠져있지 말고 성경이 보여주는 가치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과감하게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해야 합니다.

내 믿음이 머릿속의 지식으로만 남아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고 행동하는 믿음이 되도록 오늘도 몸부림쳐야 하겠습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