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도 모르게 나 역시 차별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인간의 죄악성이 나타나는 여러 부분 중 하나는 “차별”에 있습니다.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기 전에는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는 순간 높고 낮음이 생겨나고 차별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높고, 누가 낮은가 평가하는 것에 꽤 익숙합니다. 선배와 후배, 연장자(年長者)와 연소자(年少者), 직장이나 조직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와 낮은 지위에 있는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등으로 나누는 데 익숙합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만나면 누가 나이가 많고 적은지, 그의 사회적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서로 상하(上下)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이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목사를 높은 계급처럼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다음이 장로, 그리고는 권사와 안수집사, 서리집사, 성도 순으로 마치 계급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직분(職分)은 직급(職級)이 아님에도 마치 높낮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교회의 일상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오래전 기독교서점에 가서 교적부 양식을 살펴보다가 신급(信級)이라는 항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신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니 그 항목에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침례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온 제게 있어서 교회의 직분을 계급이나 등급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사이에도 그러한 것이 존재합니다. 큰 교회 목사는 좀 더 존중받고, 작은 교회 목사는 약간 무시당하는 것은 다반사(茶飯事)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요, 모두가 한 가족이며, 차별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부유하거나 학식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대우가 달라집니다. 소개도 더 거창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가 교회에 오면 약간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행색(行色)이 남루(襤褸)하고 비루(鄙陋)하면 무시하기도 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 들이지 않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길 때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에게 먼저 맡겨집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고, 신실해도 사회적 지위가 높지 못하면 교회의 허드렛일 정도를 맡기는 직분만 주어집니다. 솔직한 요즘 교회의 민낯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엄연히 그러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현실을 끄집어내 그러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9절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차별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린 사람을 차별 대우하는 것이 가벼운 실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0절, 11절은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율법의 하나라도 어기면 결국은 율법을 어긴 자가 되는 것처럼 사람을 차별하는 죄를 지으면 결국 간음이나 살인을 저지른 죄와 다를 바 없는 죄인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을 명시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1절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셨으며,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3:22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물론 차별과 달리 분별과 구별은 필요합니다. 차별은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은 본질 자체가 다른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구별은 성질과 종류가 다른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옳고 그름,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진실과 거짓을 잘 구별해내는 것을 분별이라고 합니다. 요즘 기독교계에서 뜨거운 이슈로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차별금지법 발의에 대한 것입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것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찬성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차별금지에는 구별과 분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나라에서 종교적 가치, 기독교적 가치를 가르치거나 구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이 들어간다면 또 다른 역차별이 되기에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되 종교적 가치나 기독교적 가치를 가르치고 구현하려는 노력이 제지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차별을 하지 말라고 해서 죄악이 만연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교회는 동성애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레 18:22; 20:13; 왕상 14:24; 롬 1:26, 27; 고전 6:9, 10; 딤전 1:10). 그러나 동성애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가 죄에서 돌아올 수 있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다른 죄에 빠진 자들에게 사랑과 긍휼로 돌아오도록 도와주는 것과 동일한 태도로 대해야 합니다.
12절은 차별하는 것도 죄이기에 동일한 율법은 잣대로 차별에 대해서도 행동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39)..그리고 오늘 본문의 8절에서도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라고 말씀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 자세는 “사랑”의 태도여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지은 자들이나 연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의 태도는 “긍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강조합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가진 자들이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했던 시대입니다(6절). 오히려 그리스도인들도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에게 핍박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7절은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합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은 아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이 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차별이 일반화되어 있는 그 시대에는 꽤 불편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방을 당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도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해주십니다(5절). 하나님은 “믿음 안에 있다면”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죄로 분별하여 구별하되, 사람을 등급으로 매겨서 차별하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는 그러한 차별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을 특별히 대우하고,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는 일이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 역시 교회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결코 지위가 놓고 권력이 많은 자로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목자로서 양들을 잘 목양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면 됩니다. 성도들도 교회의 직분을 직급으로 여기지 말고 교회공동체를 위해 신실하게 섬기는 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차별이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를 세워주고 섬기는 모습으로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지체들을 잘 세워주고 섬기는 교회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하며 잘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안창국 목사)